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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 뭐라/한약잡설

신종플루와 팔각회향


 요즘 전세계를 소란스럽게 만들고 있는 신종플루의 거의 유일한 치료제처럼 여겨지는 타미플루(Oseltamivir)의 원료물질이 향신료 또는 한약재로 쓰이는 팔각회향(八角茴香)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팔각회향의 약효가 주목받고 있다. 팔각회향은 중국에서 나는 붓순나무과 식물인 팔각(八角, Illicium verum)의 열매로, 모양이 팔각별처럼 생기고 강렬한 향기가 있다고 해서 팔각회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그림 1). 그런데, 이 열매의 성분 중 하나인 시킴산(shikimic acid)이 타미플루의 원료물질이라는 것이다. 시킴산은 붓순나무(Illicium anisatum, 일본명 ‘시키미しきみ’)에서 발견되었다고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는데, 사실 팔각회향뿐 아니라 대부분의 식물에 함유되어 있으며, 단지 시킴산의 추출수율이 높기 때문에 팔각회향을 원료로 사용할 뿐이다.

그림 1. 팔각회향 (사진ⓒ Brian Arthur)



 따라서, 팔각회향에서 추출한 시킴산이 타미플루의 원료물질이 된다고 해서 팔각회향이 신종플루에 대한 치료효과가 있는 것으로 속단해서는 안 된다. 팔각회향은 시킴산을 비롯한 수많은 성분의 집합체이며, 타미플루 또한 시킴산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먼저 시킴산으로부터 타미플루를 합성하는 과정을 보자(그림 2).

그림 2. 시킴산으로부터 타미플루를 합성하는 과정



 위 그림 좌상단의 시킴산과 최하단의 타미플루 구조를 비교해 보자. 두 물질이 같은 특성을 갖는다고 볼 수는 없다. 십여 단계에 이르는 복잡한 합성 과정을 통해 전혀 다른 물질로 바뀌는 것이다. 그리고, 시킴산이 아닌 다른 물질로부터 타미플루를 합성하는 방법도 있다(그림 3).

그림 3. 타미플루를 합성하는 다른 방법의 예(락톤계 화합물을 전구물질로 사용)



 이상에서 시킴산과 타미플루는 전혀 다른 물질이며, 시킴산을 함유하고 있는 팔각회향 또한 타미플루와 유사한 효능이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음을 알 수 있다. 애초에 타미플루의 개발과정에서도, 일반적인 천연물 스크리닝 방식이 아니라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특정효소(neuraminidase)에 들어맞는 분자구조를 설계해서 개발한 것이다. 즉, 타미플루는 처음부터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적용하려고 ‘만들어진’ 물질이며, 시킴산은 그 물질을 대량생산하기 위한 재료에 불과하다. 시킴산은 타미플루뿐 아니라 페닐알라닌(phenylalanine), 트립토판(tryptophan), 각종 알칼로이드 등 여러 가지 화합물의 전구물질로 활용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팔각회향은 어떤 약효가 있을까? 팔각회향은 향기가 강하고 맛이 매워서 주로 향신료로 많이 쓰이며, 한약 처방에는 별로 쓰이지 않는다. 하지만, 의서(醫書)에는 추위를 쫓고 기운의 순환을 원활하게 도와주며 통증을 멎게 하는 효능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추위를 쫓는다’고 해서 감기나 독감에 좋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도 있으나, 사실 팔각회향은 감기의 찬 기운을 없애는 해표약(解表藥)이 아니라 뱃속을 따뜻하게 하는 온리약(溫裏藥)이므로 작용 방향이 다르다. 오히려 의서에서는 팔각회향의 성질이 조열(燥熱)하므로, 폐위(肺胃)에 열이 있거나 열독(熱毒)이 심한 경우에는 사용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급성열성호흡기질환인 신종플루에 팔각회향을 처방하는 것은 부적절한 처사이다.

 그렇다면 한방으로 신종플루를 치료하려면 어떤 약을 사용해야 할까?
 우선 신종플루는 괴질(怪疾)이 아니라 그저 독감의 일종일 뿐이라는 전제하에 치료법을 구상해야 한다. 한의학에는 감기나 독감 등 바이러스성 호흡기질환에 응용할 수 있는 수많은 처방이 있으며, 환자의 증상과 체질에 따라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좋은 치료 효과를 거두어왔다. 신종플루도 일반적인 감기나 독감처럼 다양한 증상이 나타나므로, 증상을 기준삼아 《상한론(傷寒論)》이나 온병(溫病) 처방을 중심으로 변증논치(辨證論治)하면 될 것이다. 누구나 만병통치약을 원하지만, 모든 환자에게 쓸 수 있는 통치약은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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